에덴 5권 라이센스판의 괴상한 번역

지금으로부터 약 수십년후의 근미래. 클로저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을 거치면서 한차례 큰 변화를 거친,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세상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SF 만화 에덴.

세주문화에서 발매되던 에덴 라이센스판의 번역은, 그렇게까지 눈에 띄게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준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전문용어나 어려운 말만 나오면 헤메는 꼬락서니를 보이긴 하지만 뭐 그런게 특별히 드문 일도 아니고, 대체적으로 그럭저럭 무난한 번역이었지요.

그런데 유난히 5권에서만 번역의 질이 심각할 정도로 떨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이 5권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한동안 '세주문화판 에덴은 번역이 전체적으로 엉망이다'라는 인식이 깊숙하게 박혀있었지요. 마침 작품 초반에 받았던 강렬한 인상도 흐려지기 시작하던 참에, 이런 인상까지 겹친 덕분에 라이센스판을 그만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에 다시 한번 주의깊게 훑어봤더니 의외로 5권 외에는 다들 괜찮은 편이더군요. 역시 계속 잘하더라도 한번 큰 실수를 하면 나쁘게 인상이 박혀버리는 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인 걸까요.

...뭐 세주문화는 사업을 접었고, 그렇다고 따로 라이센스를 인수해서 계속 발매해줄만한 출판사도 없으리라 생각되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이제는 사업도 접고 발매도 중지되고 했으니, 한번 마음편하게 5권에서 벌어진 참극들을 되짚어보도록 할까요.

75페이지

아버지의 친구 뉴코를 만나러 온 주인공 엘리야는 그와 동거하고 있는 여성인 리타에 대하여 짤막하게 논평합니다.

"응.... 그래도. 불쌍한 사람이야. 같이 살고 있는 거야?"

아니... 아무리 봐도 엘리야가 리타를 동정할 만한 내용은 전혀 안 나왔었는데. 혹시 아버지 친구한테 대고

"저 리타라는 아가씨는 뉴코 따위와 동거하고 있다니 정말 불쌍한 사람이근영 ㅋㅋㅋ"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가?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놈 같으니!)

아마도 원문에서는 "귀여운(かわいい) 사람이네" 정도로 되어 있던 대사를 불쌍한(かわいそうな)으로 해석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고 있습니다.

79페이지

뉴코는 엘리야에게 그의 아버지 엔노이아에 대하여 평합니다.

""에노야는 여자이면서도 리더의 기질을 가졌지"

아....아빠가 여자란 말인가?! (쿠쿵) 그렇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엄마는 남자?!! (콰콰쾅)
이 만화가 생각나는 충격적인 설정이로군요.

95페이지

군사조직 노마드의 일원인 해커 소피아에게 접근한 인공지능 '마야'는 공항에서 일어날 분쟁에 개입할 것을 요청하면서, 현장에 나타난 엘리야 소년이 갖는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녀는... 내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

엘리야도 남장여자였단 말인가! (부자가...아니 모녀가 취미가 똑같네요~ 얼레리 꼴레리)

105페이지

납치당한 어머니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공항에 잠입한 엘리야에게 친구인 리키가 도움을 자청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 누나를 죽인 적 있는 녀석이지? 나도 돕지"

마침내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실. 이후의 회상 장면에서 과거 엘리야의 누나였던 지나는 원부연방이 관련되었다고 의심되는 폭탄 테러에 휘말려들어 죽었다고 나오는데, 실은 범인은 엘리야 본인 (당시 약 10세. 혹은 그 이하) 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리키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한마디 덧붙입니다.

"나도 형을 칼로 죽였다고...."

....이 패륜아들!!

142페이지

엘리야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태우고 발진하는 수송기에 반 비행형 로봇이 호위로 붙은 것을 본 마야의 말.

"하지만 하에가 붙었군"

한자로 파리 승(蠅)자나 히라가나로 はえ라고 써있지 않고, ハエ라고 써 있었나 봅니다...-_-
(팔공 (八工)이라고 해석해놓지 않은게 천만다행이군요)

148페이지

발진하는 수송기에 S.S.G. 탄이 적중하도록 유도해 이륙을 막는 소피아. 그런데 계산 실수로 인해 수송기가 공항 청사 건물에 격돌하게 됩니다. 생각도 못했던 실수에 절박한 표정으로 외치는 소피아.

"해냈다, 제동예측계산을 미스했다!"

이봐, 당신의 그 실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계획이 엉망으로 꼬였는데 그렇게 신나는 말투야! 혹시 일부러 노린건가? ('소피아는 실은 원부연방의 스파이' 설 강력하게 제기중)

171, 205페이지

원부연방의 공작원과 엘리야를 도우러 온 노마드 요원 켄지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가족을 구하러 온 엘리야가 호위 로봇인 켈빔과 함께 나타납니다. 그것을 보고 반갑게 외치는 엘리야의 여동생 마나 발라드.

"형!"

....너는 여장남자였단 말이냐 OTL
(이와 같이 5권 번역의 기본 사상은 '성별 바꾸기'입니다.)

뭐 이 소녀는 이전 장면에서는 켄지가 나타나면서 오빠인 엘리야도 공항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이런 대사도 합니다.

"형제가 왔군"

자신의 형이나 동생을 부를때 당당하게 '형제'라고 하는 걸 보면 자꾸 이 사내가 생각나서 괴리감이....
솔리드 스네이크 팬클럽 회원 넘버 001 리퀴드 스네이크 선생
"오래간만이군, 형-제!"


덧글

  • 墮天使블루싸이 2005/04/19 16:52 # 답글

    …패륜아 대사에서 뒤집어졌습니다.
  • 시대유감 2005/04/19 16:55 # 답글

    제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강렬한 번역은 대부분 아마추어 번역가 분들의 애니 자막들이었는데..
    강철의 연금술사 1화에서 '보아라, 이것이 키메라다!!' 를 '보아라, 이것이 너희들이다!!' 로 해석해놓은 게 첫째였고.
    (키메라를 키미라로 잘못 들었나 봅니다)

    두 번째는 밴드 애니 BECK에서 "마호가 오지 않았어..." 를 "마법이 나오지 않아..." 바꿔놓은 것.
    마법의 독음이 '마호' 다 보니 인물 이름인 마호랑 햇갈렸는지 갑자기 극을 판타지로 바꾸더군요.

    하기야 이런 거야 피차 웃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돈 받고 일하는 프로는 그런 실수하면 곤란하죠.
    대표적으로 많이 거슬리는 게 외래어 표기를 번역하는 거. (러쉬로드 -> 랏슈로드, 햄머 -> 한마 등)
  • MATARAEL 2005/04/20 11:47 # 답글

    墮天使블루싸이님 > 뭐 원래 대사야 '너희 누나도 원부연방 놈들 때문에 죽었지? 우리 형도 찔려죽었어' 하는 정도의 의미였겠지요. 원래 저런 대사라면 아주 쇼킹한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 아니 다행입니다.

    시대유감님 > 옛날에 아무것도 모를 시절 "그래도 돈 받고 하는 프로들인데 기본은 하지 않겠어?" 라고 말했다가 주변사람들이 모두 쓴웃음을 짓는걸 보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뭐 스타 번역가 박련씨같은 자칭 프로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보니....
  • torizan 2005/04/22 10:04 # 삭제 답글

    번역은 제2의 창작! 이란 말이 새로이 떠오르게 만드는구나...
    번역자가 실은 개그물을 좋아한다던가...-_-;;;
  • MATARAEL 2005/04/22 11:05 # 답글

    뭘 이정도 갖고~ 우리들은 이미 날라리 번역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환상적인 번역을 함께 목격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예전의 코.... (쉿쉿, 조용히!)
  • 잠본이 2005/08/25 13:13 # 답글

    '해냈다'는 아무래도 '일났다'나 '망했다'같은 낭패스러움을 담은 대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 MATARAEL 2005/09/20 15:52 # 답글

    아마 그럴겁니다. 원문이 뭔지 모르고 본 상태에서도 대충 그런 뉘앙스라는건 어림짐작할 수 있었지요. 대체 얼마나 시간에 쫓겼으면 (혹은 대충 했으면) 그런 부자연스러움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원;
  • 전액환불 2008/05/24 17:03 # 답글

    정말 재밌네요 볼때는 별로 신경 안쓰고 봤었는데
  • MATARAEL 2008/05/31 21:07 #

    그냥 오역인 경우에는 원판과 비교를 해보지 않는 한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세주판 5권은 대놓고 눈에 띄는 괴번역이 난무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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