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언제나 상쾌한 기분 3권

'언제나 상쾌한 기분'은 '아기와 나'로 폭넓은 지지를 얻으면서 유명해진 작가 라가와 마리모가 비정기로 연재하고 있는 청춘 학원물입니다. 세 명의 개성있는 고교생과 그 주변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이 작품은 10년 동안 고작 세 권만 발매되는 느린 진행 탓인지 인지도는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지지를 받고 있는 편입니다. 저로서는 소녀만화 특유의 선남선녀 과잉인 환경이라던지, 뜬금없이 BL적인 요소를 집어넣는 -작가의 성향이 원래 좀 그렇긴 합니다만- 전개 등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어쨌든 재미있게 보았고 다음 권도 기대하고 있는 편이었군요. 그래서 얼마 전 만화방에 갔다가 3권이 드디어 나온 것을 발견하고는 (실은 작년에 나왔죠) 이렇게 된 김에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게 되었는데요.

거의 새로 읽기 시작하는 기분으로 1,2권을 재독한 후 3권에 들어가자, 갑자기 다른 그림이 나오길래 잠시 당황했습니다.
누구세요

'아기와 나' 시절부터 라가와 마리모는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개성있으면서도 반짝반짝 빛나게 그려내는 미려하면서도 힘있는 터치가 뚜렷한 인상을 안겨주던 작가였습니다. 특히 뒤통수를 탁 치면 금새라도 주루룩 흘러내릴것만 같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중요한 장면마다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었지요.
당장 언제나 상쾌한 기분 1,2권 시절만 해도 이런 그림이었는데 위쪽의 3권 그림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책장을 넘기면서 나름대로 즉석추리를 해보았습니다.

아하~ 요즘 많이 있는 신참 작가가 선배의 작품을 자기 그림체로 그려내서 헌정하는 이벤트의 일환이로군!
-> 이렇게 해놓고 중간쯤에 '쨘~ 놀랬죠?' 라고 할 생각이겠지. 하하하 이녀석~
-> 그렇다 해도 다른 유명한 후배작가들도 많을텐데 이런 듣보잡 그림체라니 라가와 마리모도 인망이 별로 없군...
-> 게다가 깜짝 이벤트 치고는 너무 긴데? 슬슬 본인으로 복귀하지 그래.
-> 그러던 와중에 첫 1/4 스페이스 (페이지 가장자리에 작가의 잡담이 들어가는 자리)에 도달.

오랜만에 찾아뵙는 「언상기」입니다!! 2권이 나온 지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이번에 드디어 3권이 나왔어요. 음!! 그림이 많이 바뀌었죠? (하략)


본인이었냐!!


저 코멘트를 발견하고는, 기절초풍하게 놀라서는 여기가 만화방인 것도 잊고 한 30초 동안 방심상태로 있었습니다. 바뀌었다고 해도 이건 좀 상상을 초월하지 않습니까. 그야 물론 장기 연재에 따라서 그림체가 변하는 일은 많습니다. 가장 극적인 변화로 기억하는 '아앗 여신님' 의 후지시마 쿄스케의 경우 5-6권에서 한번 동글동글한 그림체로 정착하는 것 같다가 8-9권에서 2차 형태로 변신하더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부터는 그림체가 스토리 전개와 함께 고공으로 승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었지요.

하지만 이 언제나 상쾌한 기분 3권에서 보여지는 변화는 그러한 점진적인 향상과는 달리, 한 마디로 추락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림이 많이 바뀌었죠?' 라고 태평하게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라가와 선생님~

가장 눈부신 미녀로 그려지던 이노마타도 (1권)

3권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으니.....


그림체 뿐만 아니라 스토리에 있어서도 뭔가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첫번째 에피소드인 꼬마 신노스케와 미도우의 이야기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그 다음의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질척질척.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했던 캐릭터인 레이코가 대대적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별로 상쾌하지 않은 기분'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전처럼 수려한 그림체가 주는 보정효과를 받지 못하다보니 그런걸지도 모르겠지만, 1,2권 시절과는 좀 다른 느낌의 만화가 되어버렸네요.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하고 나름대로 가설을 제시해보았습니다.

1. 외계에서 온 신체 강탈자가 라가와 마리모 행세를 하고 있다.
2. 작가가 하도 연재를 안하자 하쿠센샤가 고스트 라이터를 고용해서 3권을 그리게 했다.
3. 원래 작품의 세계관을 차용해서 그려낸 일종의 앤솔로지이다.
4. 하도 오랫동안 연재를 안하다보니 그림 실력이나 스토리 구성 능력이 모두 현저하게 퇴화되었다.
5. 대원에서 아무나 고용해서 대충 그리게 한 가짜 해적판이다. (90년대 국내 해적판 전성기에는 진짜로 있던 일)
6. 실은 라가와 마리모는 비주류이기에 이 훌륭한 만화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을까봐 걱정한 일본 만화계 기득권층의 음모다.


그런데 실은 더 최악의 경우일 가능성도 없진 않습니다. 혹시라도 작가가 병이나 사고, 또는 일신상의 불행을 겪으면서 무리하게 작품활동을 계속하다보니 이런 결과물이 나왔다면? 만약 정말 이런 이유라면 이렇게 농담거리로 삼은게 참 미안해지는 상황입니다만....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해도 3권의 퀄리티가 낮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요즘은 '어떤 작품을 비판하면 그 작품을 즐겁게 본 사람들의 추억을 짓밟았으니 나쁜 짓'이라는 극단적인 논리가 돌아다니고 있던데,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겠죠?)


P.S 나중에 한가지 더 놀란게, 한국이나 일본 웹에서 라가와 마리모나 본 작품에 대해 검색을 해봐도 3권의 놀라운 변화에 대한 지적이 전혀 안 보이더라는 것. 그야 구글이나 이글루에서 검색 넣고 나오는 1,2페이지만 찾아봐서 그런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적 사이트의 서평에서도 작품 관련 감상글에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길래 어리둥절했습니다. 오죽했으면 5번 가설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보면서, 제가 보았던 '언제나 상쾌한 기분' 3권이 하쿠센샤에서 내고 대원이 라이센스 발매한 정품이 맞는건가 하고 재확인까지 해봤을까요.

P.S2 참고로 '언제나 상쾌한 기분' 단행본의 발매 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판 기준)

1권: 94년 9월
2권: 97년 11월
3권: 04년 12월

덧글

  • NOT_DiGITAL 2007/08/07 18:36 # 답글

    텀이 너무 길었으니까요. -ㅅ- 저도 사실상 단편으로 나왔던 1권만을 봤고... 그림은 샤니무니 GoGo 를 보고 이미 희망도 꿈도 버렸기 때문에 말이죠. 샤니무니 고고 도 결국 1권 보고 그만뒀습니다. 딱히 그림 때문이라기 보다도 왠지 잘 안 맞더라구요. 어릴 때 아기와 나, 언상기는 꽤 열심히 봤는데 말이죠.

    NOT DiGITAL
  • Satyne 2007/08/08 06:03 # 답글

    밸리에서 보고 불쑥 글을 남깁니다.
    만화책을 직접 보지 않아서 확실한건 아닌데, 올리신 그림으로 봤을때, 작가분이 컴퓨터로 작업하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만약 컴퓨터 작업이 맞다면, 작가분이 아직 컴퓨터 작업에 익숙하지 않으신 듯 합니다.
    작가분이 컴퓨터 작업에 익숙해지셔도 다소 그림체가 바뀌게 될 것 같긴 하지만요.
  • --G-- 2007/08/08 10:50 # 답글

    몇몇 표현이 가슴을 찌르는 웃음을 자아냅니다. 저 이노마타의 저 웃는건지 울기 직전인건지 모를 표정은 참-.-;
    근데 한동안 안 봐서 그러는데 저스트 고고 도 저런 그림으로 연재되는 건가요;;;;
  • MATARAEL 2007/08/08 11:59 # 답글

    NOT_DiGITAL님 > 그러고보니 정말 계속 연재중이던 저스트 고고가 있었네요. 그걸 떠올리고 나니 새롭게 '주화입마' 설도 추가해볼만 하겠습니다.

    주화입마: 제법 경력있는 몇몇 만화가들이 드물게 걸리는 상태에 대해 멋대로 붙인 명칭. 그림이 발전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무리한 변화를 시도하거나 방향을 잘못 잡고 갈팡질팡하다가 오히려 그림체가 더 이상해지는 경우.

    Satyne 님 > 아..... 저 그림체를 보면서 묘하게 최근의 만화에서 종종 보던 스타일이 섞여있다고 생각했더니, 컴퓨터 작업으로 전환하면서 생긴 현상일 가능성도 있군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막혔던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디지털 주화입마'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직은 작업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다 하더라도 저 그림체 변화는 역시 너무 아쉽습니다. 애초에 라가와 마리모의 화풍은 디지털 작업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G님 > 이노마타 표정은 뭐 그렇다 쳐도 , 기본적으로 눈이 짝짝이예요 흑흑~

    저도 이 작가는 언상기 3권으로 정말 오래간만에 접할때까지 신경 안쓰고 있었는데, 이것때문에라도 호기심이 생겨서 저스트 고고가 최근에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싶어졌습니다.
  • Satyne 2007/08/09 07:06 # 답글

    컴퓨터로 저런 섬세한 선 표현은 상당히 무리가 있습니다. ^^;
    편리하기는 하지만, 디지털이라 아직은 수작업 만큼의 표현이나 효과가 나오지 않지요.
    대신, 디지털 작업의 이점은 톤작업이 쉽고 철자 작업이나 기타 수정 작업에 유리하며, 돈이 적게 (톤값이나 원고지 기타등등) 들지요.
    작가님이 돈은 많이 버셨으니까 돈문제때문은 아니테고 쉬운 톤작업이나 기타 수정에 유리함 때문에 컴퓨터 작업으로 전환 하신게 아닐까 싶네요.

    이 글 덕분에 '언상기'를 보게 되었는데, 정말 재밌네요!! :)
  • 만년여동생 2007/08/09 11:05 # 삭제 답글

    하하하 이녀석!!!
  • MATARAEL 2007/08/10 12:05 # 답글

    Satyne 님 > 과연 그런 잇점들이 있는 것입니까... 역시 그림을 직접 그리시는 분 입장에서는 다양한 사정이 눈에 보이는 거로군요. 덕분에 저도 이것저것 알게 되었습니다.

    3권이 좀 저렇긴 해도, 발매 간격이 무지하게 길긴 해도 언상기는 재미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갈 방향이 느슨한 학원물이 주는 편안함이 있지요.

    만년 > ha ha ha~
  • 현상 2007/08/13 17:33 # 삭제 답글

    국내 작가로 '유현'을 보세요. 선녀강림 초반부랑 요즘 작화랑 느낌이 상당히 틀립니다. ^^;;
  • MATARAEL 2007/08/14 16:35 # 답글

    실은 그분의 동인지(...)도 갖고 있는 입장에서, 부디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 그림체 2008/05/21 03:27 # 삭제 답글

    저스트고고 때문에 연제기간이 늘어난거 같내요
    저도 3권까지 봤는데 그림체가 변하는게 눈에 띠지만 딱히 싫은건 아닙니다
    오히려 인물들 감정표현 이라던가 좀더 잘 표현되는거 같내요
    2권까지야 아기와 나 스타일이고 3권부턴 저스트고고 처럼 비슷해 보여요
    아마 이번년이나 내년초에 고고연재 끝날꺼같으니 그다음을 기대합니다 ㅎ
  • 그림체 2008/05/21 03:28 # 삭제 답글

    아참 성장기니 ㅋ 얼굴변하는건 당연 ㅋ?
  • MATARAEL 2008/05/22 16:05 # 답글

    '아기와 나' 시절의 그림체도 계속 보다보면 질리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번 3권은 보기에 많이 부담스럽더군요. 변화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만 기왕 작업 방식과 그림체를 바꾸기로 했으니 빨리 익숙해져서서 새로운 형태를 안정시켰으면 합니다.
  • 현요 2012/07/21 20:34 # 삭제 답글

    그건 이미 저스트고고로 그 그림체가 익숙해져서가 아닐지ㅎㅎ 한창 보던 와중에 언상기 3권이 나와서 별 위화감 없이 봤던 거 같아요. 근데 오랜만에 본 애장판 아기와 나의 작가님이 새로 그린 타쿠야를 보고 누구!? 하고 외쳐버렸다는ㅡㅡ;; 97년과 10년의 위화감은 진짜 무시 못하겠네요...그 느낌이 절대 안 나와요. 그리고 라가와 님이 얼마나 작화가 안정되어 있었는지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ㅎㅎ
  • Siana 2014/07/12 13:23 # 답글

    다른 작품 그리는 중간 중간 그린 책이라 그런지 이 작가의 그림체 변화를 한 눈에 알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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