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뒷북이지만, 십이국기 번역 유감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책을 찾던 도중, 십이국기 한국판을 발견하고는 심심한 김에 좀 들춰보게 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일판으로 읽기 시작하다보니, 한국판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소문은 들어봤어도 제대로 보게 되는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가장 훈훈한 에피소드인 바람의 바다 편을 뽑아 슬쩍 훑어내려가다보니, 문득 어색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소우' '리사이' '요우카' '산시' 등등. 고유명사가 전부 한자의 일본어 독음으로 표기가 되어 있던 것.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어딜 봐도 고대 중국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진 세계이며, 따라서 한자로 된 고유명사를 읽을 때의 기준도 간단명쾌하게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냥 한자의 한국어 독음 그대로 읽으면 ok.

예를 들어 일본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주인공의 孫悟空이라는 이름은, 원전이 중국이라고 해서 SūnWùkōng 으로 읽을 필요도 없고, 일본식 독음에 따라 そんごくう라고 읽을 필요도 없이 그냥 '손오공'이라고 해 주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따라서 태(泰)국의 기린을 부르는 호칭은 태기(泰麒). 태기의 선택을 받은 왕의 이름은 효종(驍宗), 태기의 충실한 수하인 여성 요마의 이름은 선자(汕子), 태기와 금방 친해진 여성 무인의 이름은 리재/이재(李斎) ....등등으로 표기해놓는게 합당할 것입니다. 주인공의 일본 이름의 경우는 그대로 '나카지마 요코'라고 해야 하며, 대신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역사책에서 언급되는 내용에서는 '경왕 양자(景王陽子)' '자를 적자(赤子)라 하였다'로 해줘야 할 테지요.


여기에 더불어 또 하나 눈에 띄는 문제가, 일관적인 방침의 부재입니다.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일단 원칙이 있으면 거기에 따라서 일관적으로 따라가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그렇지도 않더군요.

가령 대부분의 고유명사를 일본어 독음대로 표기하다가, 태기가 길들이게 되는 최강의 요마의 이름인 饕餮은 갑자기 한국어 독음대로 '도철'로 표기해놓는다던지, 같은 직함을 가리키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재보'라고 표기하고, 어떤 때는 '경 타이호'라고 표기하는 등, 기준이 이리저리 섞여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표기 방식을 찾아보려고 페이지를 넘기다가 보니 이런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더군요.

"리사이도노"

헉..... 그리고 페이지를 좀 더 넘겼더니 이런 표현도.

"교소우사마"


.................



으음, 게시판이나 채팅룸이나 덧글란에서 팬들끼리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는 중이라면야 '~사마'건 '~쨩' 이건 '~도노' 건 뭘 못 쓰겠습니까만은, 정식으로 번역해서 출간된 작품에서 '리사이경' '교소우님' 이라고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을 굳이 저렇게 관철할 것 까지야 있었을까요-_-

출판사 편집부는 대체 뭘하고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것도 벌써 5년도 넘게 지난 옛날의 일이라는 점에서 볼 때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군요. 요즘에 나왔던 비슷한 세계관의 '채운국 이야기'라는 소설의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고유명사 원칙이 제대로 지켜져서 나오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경험이나 원칙, 노하우가 없던 시절의 해프닝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P.S 하지만 그 해프닝(?)의 영향은 한국 위키백과의 십이국기 관련 항목에 아직까지 굳건하게 남아있군요;

덧글

  • 만년네이놈 2008/01/14 00:30 # 삭제 답글

    저는 패북주의자라 상관이 없습니다. 하하하.
  • SPACE 2008/01/14 01:02 # 답글

    저도 2권까지만 보고 인물관계가 더 헷갈려지는 관계로 포기햇습니다.
  • 월광토끼 2008/01/14 01:30 # 답글

    교소우사마? 교장님? [..]

    그러고보니, '일기당천' 번역본에서는 '손사쿠 하쿠후'로 표기된게 '손책 백부'라는걸 알기 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 dunkbear 2008/01/14 11:25 # 답글

    애니를 먼저 본데다 위의 번역 문제 때문에 책에 선뜻 손이 안가더군요...
  • 유레인 2008/01/14 11:48 # 답글

    음.. 이 책 번역이 조금 안좋은 이유는 최조 번역이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냥 개인 웹에서 번역 한 것을 그대로 출판에 들고 왔기 때문이죠. 좀 신경써 주었으면 좋겠더니만...
  • 수현 2008/01/14 12:20 # 답글

    '님' 이라고 할 수도 있고 '~씨' 라고 할 수도 있는 걸 그렇게 표현한 게 싫더군요.
    말씀하신 도철이나 재보 같은 예로 들 수 있는 단어 문제도 자꾸 거슬리고...
    결국 조금 읽다가 관뒀습니다. -_-; 내용에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 라비안로즈 2008/01/14 12:58 # 답글

    애니에서는 나름 표현이 되어있던 부분도 있었지만..
    저는 책을 중학교때 먼저 본지라;;;
    나름 괜찮았던 번역 같았는데 말이죠;;(어느 출판사인지는 모르겠지만;;)

  • MATARAEL 2008/01/14 23:56 # 답글

    만년사마 > 패북주의자라서 절대대장부?

    SPACE님 > 으음, 초반부는 이렇다 할 복잡한 인물관계도 없는 편인데 그렇게까지 되다니 예상 외로군요;

    월광토끼님 > 일기당천이라면 그 외에도 '관우 운장' '조조 맹덕' '주유 공근' 같은 식의 괴이한 이름 부르기를 유행시킨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었지요...

    dunkbear 님 >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웬만하면 책 쪽도 한번 접해보시길 권합니다. 사실 애니판은 NHK 방영이라 그런지 이래저래 온건하게 수정된 방향이 많다보니 원작 팬들 중에는 질색하는 분들도 있을 정도거든요. 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1권 내내 펼쳐지던 나락으로 떨어지는 분위기는 정말 끝내줍니다!

    유레인님 > 사실 그런 부분은 편집부에서 조금만 신경썼어도 충분히 고쳐질 부분일 텐데, 그쪽은 판형 늘리고 글자 간격 넓히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도 안 쓰셨나 봅니다 HA HA HA~

    수현님 > 인터넷 상의 사설 번역(?)에서도 보고 있으면 뭔가 밍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표현인데 제대로 출판된 책에서 보고 있자니 참 묘한 기분이었죠.

    라비안로즈님 > 용어 사용과는 별개로 번역 자체는 그럭저럭 호의적인 평가를 많이 받던 것 같더군요. 저는 느긋하게 읽어보려다가 저거에 정신이 팔려서 결국 제대로 감상은 못했군요...
  • BLUE-PSY 2008/01/16 21:18 # 답글

    '사마'에서 제대로 기겁했습니다. 아니 무슨 번역을 저렇게..
  • 스폴 2008/01/29 18:06 # 답글

    11권이었던가 중간에 독음을 제대로 표기하도록 바뀌었던 것 같던데, 알아보니 번역자가 바뀌었더군요. 어찌 되든.. 괴 번역작.. 원작이 참 아까워요.
  • 야옹이짱 2011/01/20 17:58 # 삭제 답글

    저도 '사마'ㅋㅋㅋㅋㅋㅋㅋㅋ 1권에 '제발 돌아와요 요코 쨔으앙~' 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ㅋㅋㅋㅋㅋ그래도 작품성이 있어서 사 볼까말까 사볼까말까 계속 고민중입니다..
  • MATARAEL 2011/01/20 21:43 #

    음, 번역이 좀 이상하더라도 재밌는 작품이니 한번 사보셔도 괜찮겠.... 다고 말하려다가 2001년 이후로 신작 단행본이 뚝 끊겼다는 걸 떠올리고는 정말 괜찮을지 의문이 생기고 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Contact

사교의 관 web 폐쇄

PSN ID: Salamis_k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