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Z


길거리에는 썩어가는 망자들이 기괴하게 울부짖으며 희생자를 찾아다닌다. 사방에서 군대가 전멸했느니 방어선이 무너졌느니 하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나마 절망적인 뉴스를 보내주던 방송조차도 하나씩 두절되고 있다. 은신처의 물자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몇 명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공포 앞에서 차츰 육체와 정신 모두가 피폐해져만 간다.....


온 세상이 좀비들의 물결에 휩싸여버리는, 소위 '좀비 아포칼립스' 계열의 스토리는 여전히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좀비물이라는 '상황'이 주는 꺼림칙하면서도 짜릿한 매력은, 그것이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온 온갖 재앙들 -전쟁, 폭동, 맹수의 습격, 자연재해, 전염병, 학살, 마녀사냥, 미신, 집단 광기 등- 이 총체적으로 응축되어 있기에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다는 특징에서 나옵니다. 이 파멸적인 사태 앞에서 인류가 기나긴 역사를 통해 터득해 온 지혜와 경험은 무력하기 그지 없고, 굳건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스템은 속절없이 무너져 갑니다. 그렇게 인류 사회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발버둥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오싹한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전부터 좀비가 세상을 점령한다면? 이라는 화두가 나올 때 종종 언급되던 작품인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 (World War Z)가 얼마 전에 마침내 국내에도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전 세계를 덮친 좀비들의 공격을 가까스로 물리치고 평화가 돌아온지 20년 후를 배경으로, 유엔 소속 조사원인 저자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생존자들을 상대로 당시의 경험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모아놓은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로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실제 사실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솜씨를 발휘합니다.


사태 발생 초기부터 종결까지의 시간 진행을 따라서 그때그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의 주인공은 다양합니다. 초기에 발생한 좀비 환자들을 목격한 의사, 가장 먼저 사태를 예측해낸 정보 전문가, 현장에서 좀비들과 맞서 싸운 군인, 지옥같은 도피행을 경험한 피난민, 심지어는 괴멸 상태에 빠진 경제 구조를 재건해낸 행정가의 회고담까지? 이런 다양한 측면을 그려내며 이야기를 보다 '그럴 듯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데서 작가의 역량은 빛을 발합니다. 좀비 사태라는 가공의 사태를 대비해서 사람들은 국가별/지역별/계층별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떤 대책이 효과적일 것인가에 대한 개연성 있는 세밀한 묘사는 그야말로 '깊지는 않지만 넓은' 지식을 풍부한 상상력과 결합시킨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에서는 세계관의 핵심이 되는 초상적인 현상을 쓸데없이 자세하게 설명하려 들다가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세계대전 Z의 경우는 어떨까요? 작가는 좀비의 행동 양식이나 능력, 약점 등에 대해서는 비교적 확실하게 설정해두지만, 그 이상의 구질구질한 설명은 가급적 생략하는 노련한 센스를 보여줍니다. 대신 각각의 영역에 특화된 체험담들 사이의 공백 속에 중요한 설명들을 슬쩍 밀어넣으면서 독자에게 상상할 여지를 제공하는 거죠. 여기에서 특유의 느슨한 이야기 구조는 오히려 큰 잇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취업 대책에도 교양 함양에도 인성 회복에도 아무런 도움은 안 되지만, 순수한 도락으로서의 기능만큼은 200%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도록 꽉꽉 들어찬 한 권입니다. 각각의 에피소들이 독자적으로 완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 완독한 후에도 대충 중간부터라도 가볍게 다시 읽어볼 수 있으니 재활용성도 매우 뛰어납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서구인다운 편견과 관점에 많이 얽매여있어서 좀 꺼림칙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 부분은 평가해줄만 합니다. 적어도 「초반에는 정통 좀비물을 표방하는 듯한 분위기로 기대를 모으더니 결국에는 덜 여문 편견과 리비도를 배설하는 데 열중하는 모 학원좀비물 만화」보다는 훨~씬 공정한 편이겠죠.



덤으로 이미 본편을 완독하고 비슷한 재미있는 읽을 거리가 없을까 하고 꼼지락대고 있는 분들께.


세계 대전 Z World War Z/ 맥스 브룩스 by 근엄자님 이글루
: 본편 뒤에 부록으로 넣어두더라도 별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고퀄리티 팬픽.

로메로식 좀비 사태 발생시 전개에 대한 조금 긴 망상 by 윤민혁님 이글루
: 한국에서 유사한 사태가 일어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 (동 이글루에서 '좀비'로 검색하면 다른 재미있는 내용도 많습니다)


P,S 이미 브래드 피트가 판권을 사서 영화로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지는 한참이 지났는데, 솔직히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작이 괜찮아도 영화도 재밌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요즘 한참 불경기다보니 제작 도중에 자금줄이 끊겨서 엎어질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은근히 신경쓰입니다.

P.S2 국내에 발간되자마자 읽고 나서 감상을 쓰던 도중에 집어친 걸, 이제야 다시 떠올리고 완성해 올립니다.


덧글

  • 킴C 2008/12/12 20:39 # 답글

    그 히키코모리 청년이 은둔고수를 만나 좀비무쌍을한다는 책이군요;;
  • 스킬 2008/12/12 20:59 # 답글

    서가에서 조금 읽어본뒤 구매를 하려하는 책입니다만 저에게는 의외로 좀비에 빗대어 현실세계를 비꼬는 이야기로 보이더군요. ^^;
    특히 동양권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흥미가 있었습니다.
  • 월광토끼 2008/12/12 21:09 # 답글

    저는 그냥 저것의 아류인 이나즈마씨의 High School of Dead나 읽으렵니..[...]
  • BLUE-PSY 2008/12/13 00:13 # 답글

    어째서 좀비라는 소리만 들으면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생각날까요.
  • 근엄자 2008/12/13 02:15 # 답글

    (어흑 졸문을 링크하시다니 좀비님들이 노하실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화는 망치기가 십상일 것 같고(한 3부작으로 만들면 또 모를까) TV시리즈가 낫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 MATARAEL 2008/12/15 16:47 # 답글

    킴C님 > 일본 에피소드 두 편에서 동양의 신비와 오타쿠의 저력에 대한 대책없는 동경이 스며나오는게 좀 웃겨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편이라고 봅니다. 마지막에는 히키코모리 청년이 자신의 스승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는 건 아니라는 내용의 대화도 나오는 등 최소한의 제동도 걸어주고 있고...

    스킬님 > 랜드 오브 데드 등의 작품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긴 하죠.

    월광토끼님 > 그야 물론 유혈낭자한 가운데 헐벗은 여캐들이 활약하는 맛이 있긴 합니다만, 2ch만 들여다보는 듯한 작가의 한심한 세계관에 더해서 주역 전원에게 '주인공 실드' (어지간한 복선이나 이벤트가 뜨기 전까지는 절대 안 죽는다) 가 발동되는게 눈에 확 띄다보니 흥미가 급감하더군요.

    좀비물이라면 모름지기 아무리 잘나고 멋지고 용감하고 비중도 많은 역전의 용사라고 해도 한 번만 삐끗하면 곧바로 끝장나버린다는 서늘한 긴장감이 있어야죠.

    BLUE-PSY님 > 재미있는 영화였죠. 전 그때 마침 새벽의 저주-랜드 오브 데드 2연타 뒤에 곧바로 감상했던지라 더욱 신나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근엄자님 > 재미있는 글을 보여주셨으니 저는 그저 소소한 링크로 보답해드릴 뿐입니다 넵.

    TV드라마 시리즈로 가면 여러 에피소드들을 느긋하게 풀어나갈 수 도 있으니 괜찮을 거 같네요. 그런데 TV 시리즈 내내 그 많은 좀비들을 계속 묘사해내려면..... 좀비보다 예산이 더 무섭겠습니다.
  • 모PD 2008/12/17 18:57 # 삭제 답글

    마크 포스터 감독이 맡았다고 하니 꽤 기대할 수 있겠지요
  • MATARAEL 2009/01/02 17:53 #

    그 정도면 아주 망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실은 감독의 능력에 대한 불신보다는, 원작의 특성상 영화 한 편에 다 집어넣기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라는 생각에서 드는 걱정도 있긴 합니다.
  • 돌다리 2012/11/07 11:24 # 답글

    잘읽고 갑니다~~
  • MATARAEL 2012/12/14 23:37 #

    영화 정보 공개 덕분에 다시 관심을 가지는 분이 많아지시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검색어가 '세계대전 Z 다운로드' 이런 검색어라서 그렇지 (....)
댓글 입력 영역


Contact

사교의 관 web 폐쇄

PSN ID: Salamis_k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