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마새] 바라기와 손가락 두 개


극연왕 재위 초기, 북부에 한 남자가 있었다. 왕의 오라비라는 왕족 내에서도 극히 높은 신분의 소유자였던 그는 얄궂게도 왕국 최대의 적인 나가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영웅왕 시절부터 아라짓 전사들이 지켜온 호전적인 전통 앞에서, 그 소망은 한낱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왕자는 영웅왕의 쌍신검을 손에 든 채 철혈같은 의지로 나가들을 분쇄하는 누이에게,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에 탐닉하는 아라짓 전사들에 대해 절망하고, 허탈해하고, 분노하였다. 그 숭고한 이상에 동조하는 자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차가운 북부에서는.


동시기에 남쪽 키보렌에도 일단의 나가들이 있었다. 나가다운 합리적이고 냉철한 추론 과정을 통해 전쟁을 계속하기 보다는 화평교섭을 통해 적당한 긴장과 교류가 있는 대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가로막고 있는 난제들 -동족들의 불신자에 대한 반감, 북부와의 연락망 부재, 기후 문제- 을, 역시 나가다운 끈기와 치밀함으로 하나하나 해결해나갔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이성적인 나가들을 상대로 펼치는 공작이기에 특히나 중요해지는 그것, 바로 '예산'이었다.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왕자와 나가들은 마침내 한계선 부근에서 비밀스러운 접촉을 시도하게 되었다. 왕자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종족들이 쌍신검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다름'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순수한 기쁨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반면 나가들은 북부의 유력한 조력자의 도움에 반가워하면서도, 그들 사회 특유의 점잖음 -혹자는 위선이라고 조롱하는- 때문에 자신들의 재정적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덕분에 나가들은 왕자의 신념에 찬 연설에 떨떠름하게 맞장구만 치면서 언제 실무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주저할 뿐이었다.

두 종족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흥미있는 광경이었지만, 충분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다름'은 종종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오해를 낳는 법이다. 마침내 왕자는 자신이 평화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될지를 물었고, 나가들은 왕자에게는 들리지 않는 환성을 니르면서 '점잖게' 요구 사항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 침묵과 더불어 제시된 손짓의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왕국 아라짓에서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한 그 손짓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 놈들은 인간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가 너무 분명합니다! 예. 간단한, 너무도 직설적인 손짓이었습니다.

-하텐그라쥬 심장탑에서 있었던 케이건 드라카의 증언-




나가는 말없이 손짓을 해 보이며 닐렀다.
[큰 거 두 장으로 쇼부 봅시다. 더는 못 깎아줘요]


왕자는 나가의 손짓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바라기를 훔쳐내면 아라짓 전사들의 호전성을 제거할 수 있겠군!’



그렇게 비극은 시작되었다.






P.S 눈마새 세계관에서 '큰 거 두 장'이 어색하다고 느껴질 경우에는 적당히 '금편 두 보따리' 정도로 바꿔서 읽어주세요.

덧글

  • NOT_DiGITAL 2009/04/16 00:31 # 답글

    ...과연! 많은 비극의 시작은 커뮤니케이션 부족에서 오는 법이지요.(먼산)

    NOT DiGITAL
  • MATARAEL 2009/04/16 23:49 #

    아닙니다, 만약 나가들이 큰 거 세장이나 네 장을 불렀다면 이런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터. 따라서 자신의 몸값을 제시할 때는 아낌없이 팍팍 부르자는 게 이 이야기의 교훈입니다 어흠흠.

    (구직이나 연봉협상에서 섣불리 따라하다가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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