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이번이 두 번째가 되는군요. 얼마 전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푹 빠져있던 미우라 시온의 후속이 될만한 작품을 찾아서 북오프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는 대신 집어든 ‘용의자X의 헌신’이 생각보다 꽤 만족스러웠는데요. 하나 더 읽어볼까 해서 고민 좀 하다가 그래도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던 ‘백야행’을 골랐습니다. 웬만한 문고본 두 권을 합쳐놓은 정도의 두께에 좀 질리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화 될 정도니 재밌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 많은 분량을 읽으면서도 별로 지루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재미를 보장해 주더군요. 원래 1주일 정도 더 출퇴근 시간에 느긋하게 즐길 생각이었는데 후반의 전개에 불타오르다 보니 결국 이번 주말에 끝장을 보고 말았습니다.


본편의 내용을 소개해보자면.

어려서 부모님과 사별한 유키호는 모두가 인정하는 착하고 영특하고 귀여운 소녀입니다. 슬픈 과거를 가슴에 품고 굳세게 살아가는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거듭 불행이 닥쳐 오는데… 결코 고난 앞에 굴복하는 일 없이 아름답고 유능한 숙녀로 자라난 유키호가 마침내 눈부신 성공을 거머쥐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감동과 눈물의 신데렐라 스토리~



.......... 그럴 리가 없지!!


이하 내용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유키호와 료지 두 사람은 표지 설명대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냉혹하고 악랄해질 수 있는지 극한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이 커플이 저지른 악행을 큰 것들만 모아봐도 이정도인데요.


0. 초등학교 시절 존속살해 또는 자살방조 및 증거조작. 그나마 이 경우는 상대가 워낙 악한 인간이어서 동정의 여지가 있었으나......

1. 중학 시절 유키호를 적대시하는 여학생을 료지가 납치해 반라로 묶어놓음. 유키호는 비밀을 지켜주는 척하면서 우위관계를 성립시켜 고분고분하게 만듬. 덤으로 0번 사건의 진실을 캐고 다니던 남학생을 유력 용의자로 만듬.

2. 료지는 자신이 알선하던 매춘업의 고객인 중년 여성이 료지의 급우와 관계 중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자 증거 인멸. 그 과정에서 시-_-간 의혹

3. 유키호는 자신의 과외교사가 대학에서 개발하던 게임소프트를 빼돌려서 료지에게 넘기고 그는 이걸 팔아서 수익을 올림. 과외교사는 유키호의 모친 사망 사건의 진실을 깨달을 뻔하지만 유키호의 눈물연기에 홀딱 넘어가서 의심하는 걸 관둠.

4. 고교시절부터 유키호를 따르며 함께 했던 에리코가 대학에 와서 자신의 매력을 깨달으면서 주목을 받고 유키호가 (아마도) 좋아하던 시노즈카 선배와 교제를 시작함. 료지는 유키호의 지시를 받아 에리코를 납치해서 나체 사진을 찍은 뒤 가족과 선배에게 보냄. 이후 에리코는 선배와 헤어지고 평생 조용하게 숨어살기로 결심하며, 유키호는 시노즈카의 전 여자친구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움.

5. 료지의 컴퓨터 관련 범죄 사업을 돕던 은행 여직원이 야쿠자의 불법 송금을 돕다가 도망쳐옴. 료지는 은신처를 알선하는 척하면서 야쿠자에게 그녀를 넘겨줘 죽게 만듬.

6. 유키호는 사귀던 부잣집 남자(시노즈카 선배의 친구)에게 그의 아이를 임신-중절했다고 거짓말을 해 결혼을 약속 받지만 남자는 파견직원으로 온 다른 여성에게 끌리면서 결혼을 중지하려 함. 하지만 남자 집 전화에 도청기(…)를 달아놓았던 유키호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료지에게 지시해 그들의 만남을 저지하고 결혼에 성공.

7. 결혼 후 출처불명의 자금과 정보 (아마도 료지가 제공)로 주식에서 큰 돈을 번 유키호는 시댁의 원조로 부띠끄를 열어 성공을 거둠. 자립이 가능해지자 순종하는 아내의 탈을 벗어 던지고 남편에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한편 6번의 여성과 남편을 다시 만나게 해서 불륜을 유도. 결국 남편 쪽에서 이혼을 요구하게 만드는 동시에 폭력남편이란 누명까지 씌워서 유리한 조건으로 이혼 성공

8. 료지는 과거 부모의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이 사건의 진실을 눈치채고는 불법 소프트 제작에 가담하라고 협박하자 그를 살해. 유키호는 자신의 양모를 도쿄로 불러들이고 그 틈에 료지는 사체를 양모의 마당에 암매장.

8. 료지는 유키호가 결혼 당시 남편에게서 빼돌린 ID를 이용해 회사의 비밀정보를 빼돌려 경쟁사에 팔아 넘겨 자신의 자리를 확보.

9. 유키호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시노즈카 선배는 탐정에게 그녀의 조사를 의뢰. 탐정이 유키호와 료지의 관계를 알아차리기 시작하자 료지는 탐정을 독살 후 암매장.

10. 유키호는 양어머니가 쓰러지면서 장기간 입원의 조짐을 보이자 자신의 사업 경영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료지에게 병원에 잠입해 양어머니의 생명유지장치를 꺼버리게 함. 장례식에 찾아온 시노즈카를 유혹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실패.

11. 유키호는 시노즈카네 집안 최고 자리에 있는 그의 사촌형과 재혼. 시노즈카가 결사반대하자 료지는 회사의 비밀정보를 경쟁사에 넘긴 뒤 시노즈카에게 누명을 씌워서 좌천되도록 유도.

12. 시노즈카의 사촌형이 사별한 아내와의 사이에 가졌던 두 아이 중 여중생 딸이 유키호를 적대시함. 유키호로부터 정보를 얻은 료지는 택배원으로 위장하고 집에 침입해 딸을 강-_-간. 유키호는 그녀를 감싸는 척하면서 증거를 인멸하고 사건을 덮으며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듬.



주인공 두 명의 내면묘사를 일절 하지 않고 오로지 행동만 묘사하는 본작의 서술방식 덕분에, 유키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독자에게조차 내비쳐지지 않는다는 점이 섬뜩함을 더해줍니다.항상 빈틈 없이 아름답고 기품 넘치며 선량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는 치밀한 계략으로 주변 사람들을 무참하게 짓밟으며 지위를 쌓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인간사회에 숨어든 식인괴물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하지요.


이들의 악행이 과연 어떻게 백일하에 드러날지, 교묘하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유키호가 어떻게 파멸하는지 알고 싶어서 열심히 끝까지 읽어 내려갔건만 마지막 결말은 좀 찝찝한 불완전연소였습니다. 료지는 죽었지만 유키호의 앞날을 막을 위협요소도 함께 사라져버렸고, 사사가키 형사에게 결정적인 증거는 이미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의 고발로 현재 남편이 마음이 좀 흔들리긴 하겠지만 어차피 그 정도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겠고, 그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살아가겠죠.

용의자X의 헌신 때도, 비록 결말은 다 지었지만 그래도 후일담이라도 조금 적어줬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요. 물론 메탈기어 솔리드처럼 엔딩에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건 정말 꼴불견이고 적당히 부족하다 싶을 때 마무리 짓는 게 깔끔하고 여운도 남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뎅겅 잘라버린 느낌이라서…. 혹시 이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래 스타일인 걸까요?


하여튼 그런 엔딩에 대한 찜찜함을 안고 인터넷에서 다른 분들의 감상을 조금 찾아봤는데, 의외로 이 악랄한 커플에 대해서 동정하는 분위기가 많아서 기겁했습니다. 아니 쟤들이 죽이거나 인생 박살낸 사람이 대체 몇 명인데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세상이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잔혹한 운명을 극복해 가는 모습’ 같은 하품 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죠? 설마 배우가 미남미녀라서 봐주는 건 아닐테고… 아무래도 드라마나 영화판은 범죄 행각에 대한 묘사가 원작 소설과 많이 차이가 나는가 봅니다 –ㅂ-;;


결국 유키호와 료지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비록 냉혹한 범죄자이긴 했지만 료지의 유키호에 대한 헌신은 진심이었고, 유키호 역시 마찬가지였겠지요. 도덕이나 양심이 완전히 결여된 사이코패스이긴 하지만 종반부에 나왔던 ‘태양’에 관한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유키호에게 있어서도 료지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료지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가던 유키호의 행동 또한, 그녀 나름대로의 뒤틀린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었을지요. (물론 저는 고거 쌤통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미스터리를 보는 이유 중 하나는 치밀하게 짜인 수수께끼와 트릭이 복잡한 추리를 통해 풀려나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에 있겠죠. 백야행에서는 십수년간 거의 완벽하게 꼬리를 감추며 범행을 계속해온 주인공들의 행적을 집념에 찬 노형사가 추적해나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종종 너무 우연에 의지하는 단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인 안경알 파편 찾아내는 장면이 우연 폭발이라서…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지문 트릭에 대해서 많이 지적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의외로 끝까지 치밀하지 못한 면이 있는 걸까요.


작품의 시공간적인 배경도 작품의 독특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19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사회상이나 풍경을 보여주는 세세한 묘사는 아마 일본인 당사자들이라면 아련한 기억으로 다가오겠지요. 주역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끈적하게 음습한 비정한 거리로 그려지는 오사카에 대한 묘사도 재미있는데, 이는 오히려 작가 자신이 오사카 출신이라서 가능한 거겠죠?


두서없이 잡설을 늘어놓기는 했는데 무척 재미있게 읽은 건 사실이니, 다음에 북오프 가면 동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다만 워낙 작품이 많아서 좀 고민되긴 하네요. '환야'는 굳이 또 이런 이야기를 읽고 싶지는 않으니 패스하고, 다른 뭐 괜찮은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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