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의 기묘한 우연

1.

자신에게 주는 연말선물로 주문한 'OL 진화론'을 퇴근길 버스에서 재밌게 읽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가 갑자기 말을 걸면서 혹시 책 제목을 알려줄 수 있냐고 묻더군요.

여기서 질문한 사람이 젊은 OL 이었고 이를 계기로 친해지게 된다면 OL 진화론 뒷표지에 실리는 광고만화같은 상황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돌아가진 않고 그냥 남자였습니다. 제목을 알려줬더니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던 것 같은데.... 으음, 그 사람은 대체 뭣 때문에 제목을 알고 싶어했던 걸까요. 그림체가 귀여워서?



2.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생일에 간단한 선물로 영화 티켓 두 장과 팝콘 할인권을 빨간 봉투에 담아서 나눠주곤 합니다. 아마도 그룹 전체의 복지 일환인 것 같은데, 올해도 약간 빨리 티켓 봉투를 받아서는 가방에 넣어두고 있었습니다.

퇴근길,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는 순간 눈 앞에 빨간 봉투가 나풀거리며 눈 앞에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가방 안쪽에 넣어뒀던 봉투가 왜 지금 떨어진거지?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얼른 주웠는데, 뭔가가 이상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투는 약간 너덜너덜해져있고 안에는 영화 티켓이 한 장만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황급히 가방을 열어보니 넣어뒀던 봉투는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그제서야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단 걸 깨달았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바로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자분이 갖고 있던 자신의 티켓 봉투를 마침 제 앞에 떨어뜨린 것이지요. 아차!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한겨울 퇴근 시간대의 지하철 환승통로인 만큼,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사이에 여자분은 종종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상황을 분석해보니 새삼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티켓 사용기한이나 봉투의 상태를 보면 그녀는 2-3개월 전에 티켓을 얻었을 듯하고, 티켓이 한 장만 남아있다는 걸 보면 호젓하게 홀로 영화를 감상하러 다니는 성향이라고 추리가 됩니다. 만약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별 생각 없이 봉투가 떨어졌다고 알려주었을 테고, 그랬다면 그녀는 한 번 더 유유자적하게 영화감상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요. 평범한 회사원의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이 날아가는 광경을 보니 양심의 가책이 생겨서 결국 봉투는 난간 위에 살포시 올려두고 귀로를 서둘렀습니다.

힘내요 아가씨, 영화 보러 가지 않는 대신에 다른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OL 진화론의 영향일까요.

덧글

  • DSmk2 2012/01/04 01:45 # 답글

    그리고 그 뒤에 오던 제3자가 봉투를 잡고 '횡재했어~' 라고 즐거워했다는 비극적인결말이...

    일어나지 않고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길 바랍니다.
  • MATARAEL 2012/01/04 17:57 #

    근데 아무래도 말씀하신 대로 제3자가 갖고 가거나 심지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더 크겠죠;; 으으 차라리 제가 낼름하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 觀鷄者 2012/01/05 09:59 # 삭제 답글

    2. '호젓하게 홀로 영화를 감상하러 다니는 성향'라고만 추정하시면 곤란하죠.

    빨간 봉투 - 최소한 주위 유사한 조직의 노동자
    한 장 남은 티켓 - 현재 스테이터스... 솔로!

    -> 이걸 유추한 만큼, 인트라넷 혹은 사내 비선을 이용하여 미담 형태로 접근하여 2012년 블랙 드래곤의 해를 둘이서 같이 보내실 수 있는 거잖습니까!
  • MATARAEL 2012/01/12 23:46 #

    후후 그런 한정된 계기를 통해서 핑크빛 전개를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자의 소양.... 그나저나 블랙 드래곤이 들어가는 순간 장르가 마계격투필살기로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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