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들의 전쟁' 을 TRPG의 막장 리플레이로 해석해보기

작년 말 국내 개봉한 영화 ‘신들의 전쟁’ 은 참으로 간만에 만나게 되는 쉣스런 블록버스터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쉣스럽냐면 지난 수 개월 동안 본 영화가 이거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영화라는 문화 전체에 대한 참렬한 모독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는 이 영화를 곰곰이 되씹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신들의 전쟁’의 개연성 없는 스토리와 맥없는 연출과 동기 따위 말아먹은 등장인물들은 분명 어이가 없긴 하지만, 이것을 모두 테이블 토크 롤플레잉(TRPG, 이하 RPG로 약칭)의, 그것도 미숙하고 무책임한 마스터와 플레이어가 벌이는 리플레이라고 생각해보면 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죠. 저 자신 역시 좋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보니 (꽤 웃기는 루니였다고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엣헴) ‘신들의 전쟁’의 엉망진창인 요소들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보면 웬지 익숙하고 친근한 기분이 들게 됩니다. 생각난 김에 한번 기억에 남는 요소들을 RPG 막장 리플레이로 재해석을 해볼까요?

순서가 좀 두서없긴 하지만 그건 이 영화 자체가 워낙 앞뒤 전개가 개연성이 없다 보니 그런 거니 양해해 주세요. 룰은 적당히 여신전생 각성편에 다른 RPG 룰을 이것저것 섞은 10면체 다이스 두 개를 사용하는 가상의 룰로 잡았습니다.


간이 판정 룰

판정치 이하로 주사위 두 개가 같은 수가 나오면 크리티컬 (대성공)

판정치 이상으로 주사위 두 개가 같은 수가 나오면 펌블 (대실패)

00이 나오면 어떤 상황에서든 최고의 결과를 내는 대성공

99가 나오면 어떤 상황에서든 최악의 결과를 내는 대실패

 

플레이어 소개(?)

A: 테세우스의 플레이어.. 마스터와 사이가 좋고 캐릭터 메이킹 시 주사위도 잘 굴려서 능력치가 이상하게 높은 주인공 전사. 플레이에 의욕적이지만 캐릭터에 대한 이상한 집착과 무대뽀 정신으로 무장한 초보.

B: 도적의 플레이어. RPG 경험자. 로도스 전기의 우드척 같은 쿨한 반항아를 연기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제약 때문에 얌전히 파티를 돕고 나중에는 칼질만 열심히 함.

C: 오라클의 플레이어. 파티의 유일한 여캐.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뒤에서 힐만 해서 그렇다. 하우스룰로 예언자계열 스킬도 갖고 있지만…

 




장면 1.
초반, 마을에 쳐들어온 적군들을 보고 다짜고짜 달려든 테세우스는 적 병사를 몇 명 쓰러뜨리지만 곧 다구리에 맞아서 잡히고, 적의 왕은 눈앞에서 테세우스의 엄마를 처형합니다.

리플레이
마스터: 자 프롤로그입니다. 허접해보이지만 무지무지무지 많은 병사들이 마을에 쳐들어왔네요! 아무래도 도망가야 할 것 같습니다.
A: 돌격할래요..
마스터: (후후, 이제 분루를 참고 도피행을 떠나려무나. 그 도중에 파티원들과 드라마틱한 만남을 준비해주겠….) ......잠깐 뭐라고?
A: 돌격한다니까요. 다들 허접하게 생겼다면서요.

마스터: 리-로이이 젠-킨스으으으으으!!!!

결국 신나는 전투를 벌이다가 머릿수에 밀려 포박 당하는 A. 마스터는 여기서 견제하지 않으면 앞으로 A를 컨트롤하기 힘들거라는 생각에 에드립으로 주인공 엄마 사망 이벤트를 연출한다.

A: 안돼! 엄마 관련으로 배경설정을 A4 다섯 장이나 만들어놨는데!!!
마스터: (다행이다…)


장면 2.
테세우스, 오라클을 따라서 탈출한 도적은 마을로 돌아가자는 무모한 주장에 반대하지만, 테세우스가 으름장을 대면서 우기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얌전히 따라옵니다.

리플레이
B: 내가 왜 그런 위험한 곳으로 따라가야 하지?
(자 날 멋지게 설득해봐 돈으로 꼬시든 사나이의 우정을 걸든 미인계를 쓰건~ 그러면 적당히 지는 척 동료가 되어주지 후후)
A: 뭐? 지금 여기서 한번 붙어볼까? (다이스를 손에 쥔다)
마스터: 아우 계속 진행 협조 안 하면 다음 플레이 때 페널티 준다?
C: (만화책 보는 중)
B: …. 아놔 알았어 따라가면 되잖아!

그렇게 파티가 결성되었다!

장면 3.
지하 묘지(?) 에서 미노타우르스를 때려잡고 에픽무기인 에피루스의 활을 입수한 테세우스는 간지나는 더블샷으로 적 병사 둘을 순식간에 해치웁니다. 그러나 에피루스의 활약은 그걸로 끝…. 근사한 활주머니까지 마련한 테세우스는 직후에 적의 기습을 받아 활을 떨구는데, 떨어진 활은 적이 끌고 온 개가 잽싸게 물고 튑니다 (…)
이런 분위기


그 후 개는 적군의 진지까지 단숨에 달려가 하이페리온 왕에게 활을 갖다 바칩니다. 참고로 이후의 묘사를 보면 이 진지는 말을 타고 죽어라 달리면 말이 지쳐 죽을 때쯤에 도달할 정도의 먼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리플레이
A: 동료를 공격하는 적들을 활로 저격할게요. (주사위 데구르르) 성공! 데미지가….
마스터: 어, 뭐가 그렇게 많이 나와? 적은 둘 다 .... 그냥 즉사했습니다.

강력한 무기에 기뻐하는 파티원들과 달리 식은땀을 흘리는 마스터

마스터: (젠장 망했다, 저거 풀파티로 10턴은 싸워야 잡을 수 있게 내보낸 적이었는데! 내가 무슨 생각으로 마지막 보스전에서나 쓸 무기를 벌써 줬지?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한담….)

(잠시 후)

마스터: 병사 리더가 테세우스에게 무장해제 공격! 테세우스는 손에 든 무기를 떨어뜨립니다.
A: 훗, 한 턴 벌었군, 그래 봤자 다음 턴엔 니들 다 죽었어!
마스터: 그때!! 대기 중이던 개가 에피루스의 활을 물더니 번개같이 도망갑니다!
A: 뭐라고요?
B: 어? 어어? 그런 게 어딨어? 막아요!
마스터: 상식적으로 당연히 가능하잖아? (뻔뻔) 아 잠깐 아직 적의 턴… 나머지 적 병사들이 테세우스와 도적에게 그래플을 겁니다. 둘 다 이동불가~ 개는 활을 물고 저 멀리 사라집니다.
A: 으아아 내 활이! 달랑 한번 써본 내 활이!

이후 마스터는 플레이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졸라짱쎈 이모탈 NPC인 올림포스 신들을 맘껏 갖고 놀게 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 체크에서 B가 펌블을 내는 바람에 그가 조작하던 아레스는 제우스에게 끔살당했다….


장면 4.
미노타우르스와 싸우다 다친 테세우스를 간호하던 오라클은 깨어난 테세우스와 잠시 인생상담을 하더니 뜬금없이 눈이 맞아서 동침하고는 예언자의 힘을 잃습니다. 아마도 제작진은 훈남훈녀가 밀실에 함께 있으면 반드시 베드신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나 봐요.

리플레이
A: 방에 우리 둘만 있다고요? 훗, 오라클에게 섹스어필을 시도하겠습니다.
마스터: (코웃음치며) 죽다 살아난 주제에 정조관념이 투철한 오라클을 꼬시려고? 마이너스 팍팍 받은 상태로 카리스마 체크 해봐.
A: (또르륵) 우와 00, 대성공!
C: (얼굴이 흙빛이 되며) 뭐야 왜 맘대로 진행이야!
마스터: (당황하며) 어 그야 거절할 권리도 있지. 테세우스의 강렬한 눈빛이 오라클의 마음을 흔들지만 그녀의 의지는 굳건합니다. C는 플러스 받고 정신력 체크를 해보세요.
C: 어… 99 … 이거 나쁜 거야?
마스터: (체념하고) 어 그러니까…. 테세우스의 매력의 포로가 된 오라클은 그와 뜨… 뜨거운 하룻밤을 보냅니다…..
A: 크하하하, 해냈다!
C: 안돼 이럴 순 없어!
마스터: 아, C는 이제 캐릭터 시트에서 예지 관련 스킬은 다 지우세요.
C: 으아아아아 A 너 가만 안 둘 거야아아!!

참고로 건전하고 상식 있는 RPG인이라면 이미 짐작했겠지만 A와 C는 모두 남자입니다.


장면 5.
하이페리온이 성채의 문을 박살내자마자 그리스 병사들은 적군이 공격하기도 전에 성벽 안쪽까지 광속으로 도주합니다. 이때 앞으로 나선 테세우스는 아무런 맥락도 설득력도 없는 어색한 연설을 하고, 병사들은 뜬금없이 감독이 시켜서 함성을 지르며 열광적인 호응을 보냅니다. 어째 용맹한 병사들이라기보다는 락페스티벌 와서 진행자의 어색한 분위기 띄우기에 억지로 동참해주고 있는 착한 관중들처럼 보인다는 게 좀 많이 에러.

리플레이
마스터: 성문이 부서지고 병사들 사이로 공포가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자, 지금이야말로 영웅 테세우스가 모두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을 때! A, 모두에게 한마디 해봐!

평소 뻔뻔하고 무대뽀스러운 A의 철면피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마스터는, 공들여 마련한 클라이맥스가 A의 혼신의 연기 (혹은 개드립)를 통해 멋지게 완성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그들의 단골 모임 장소이던 외진 카페는 그날따라 리얼충 커플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이미 주변에서 쏟아지는 의아한 시선에 주눅이 들어있던 A는, 새색시같이 얌전하게 선언을 했다.

A: 어… 그러니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병사들에게 외치겠습니다. 나도 여러분들이랑 비슷한데, 어… 열심히 싸웁시다 뭐 그렇게요.
마스터: 음… 그리고 또 할말 없어?
A: 네 없어요.
마스터: (실망하며) 그래 카리스마 체크나 해보자 마이너스 좀 받고….
A: (또르르) 성공입니다.
B: 뭐 어쨌든 판정은 판정이니 성공이네.
마스터: (자포자기하며) 병사들은 갑자기! 칼로 방패를 신나게 두들기며! 엄청난 함성을 내지릅니다!! 우어어어어!! ㅠㅠ
A,B,C: ………….

장면 6.
전투가 한참인 가운데, 과거 하이페리온 왕에게 투항하고 고자(-_-)가 되었던 배신자가 뭔가 해낼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테세우스에게 덤빕니다. 하지만 테세우스에게 순식간에 썰리더니 별다른 대사도 없이 10초 만에 퇴장합니다. (…)

리플레이
마스터: 배신자는 적 병사들과 함께 여러분을 향해 용맹한 기세로 달려듭니다. 전투 개시!

사실 이 전투는 파티원들이 자기 캐릭터로 하는 마지막 전투인 만큼 마스터는 세심하게 준비를 해놓았다. (이후로는 다시 졸라짱쎈 이모탈 NPC를 조작하면서 즐거운 핵&슬래시 이벤트를 개최하면서 캠페인을 마무리할 계획) 하지만 마스터도 인간이고 플레이는 슬슬 늘어지고 연말이라서 기분도 꿀꿀한 가운데.

종업원: 저기 손님 죄송하지만 30분 뒤에는 폐점 시간이라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터: 헉 벌써 이런 시간이….
A: 빨리 끝장을 봐야겠군, 우선은 가볍게 선제공격! (또르르)
마스터: 어 못 피했고요…. 네 죽었습니다. 전투 끝.
A: 뭐 뭣이?!!
C: …방금 이거 중요한 전투라고 하지 않았어요?
마스터: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B: 아니 단역 NPC 치고는 캐릭터 시트가 좀 화려해 보이는데….
마스터: 허허 그럴 리가~ 이놈을 잡아야 하이페리온 왕을 추적할 수 있다는 의미였지. 자자 오늘 플레이는 여기까지!
C: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뭐 그렇긴 하네. 그럼 막차 끊기기 전에 어서들 갑시다.
A,B: 그런가….
마스터: (휴우 살았다)

캠페인 내내 뒤에서 힐만 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여서 빨리 이모탈 NPC를 갖고 놀고 싶었던 C의 배신으로 인해 이 날의 플레이는 무사히 종료되었던 것이다.


으음, 이런 식으로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보니, 상영 시간 내내 어이가 없었던 스토리도 캐릭터도 왠지 정겹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밉살스러워 보이는 듯하기도 하는군요…. (위의 리플레이는 영화의 내용에 맞추느라 억지로 구성한 막장 플레이이므로 착한 RPG인은 따라 하지 맙시다)


그 외에도 마지막 전투 전에 테세우스가 입는 그리스군 갑옷이 아무리 봐도 하늘하늘거리는게 스티로폼에 은칠한 티가 팍팍 난다든지,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는 씬에서 감독이 NG를 많이 내서 그런지 맨 앞에 있는 병사의 방패가 유독 칠이 많이 벗겨져 있었다든지, 홀로 살아남은 제우스가 아테나의 시신을 안고 사방에서 티탄들이 달려드는 가운데 장엄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처럼 폼 잡더니 광속으로 튀는 장면에서 대폭소 했다든지 여러 가지 웃기는 요소가 많긴 한데 힘드니까 대충 여기까지 끝.

핑백

  • 잠보니스틱스 : 오늘의 청명한 잡동사니 2012-02-05 00:15:02 #

    ... ★영화 '신들의 전쟁' 을 TRPG의 막장 리플레이로 해석해보기 (MATARAEL님) 이거 드라마화해서 영화장면과 교차편집하면 지금보다 두배는 더 재미있을듯 ★Daicon IV 영상을 MMD로 (세 ... more

덧글

  • 팽귄 2012/02/02 21:20 # 답글

    ㅋㅋㅋㅋㅋ 정말웃기내요
  • MATARAEL 2012/02/14 20:28 #

    후후 여기서 공감하시는 분들은 다들 한번씩 이런 막장플레이를 해보신 분일 거라 믿습니다.
  • 잠본이 2012/02/02 21:53 # 답글

    으읽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영화보다 한 수십배는 더 재밌군욬ㅋㅋㅋㅋㅋㅋㅋ
  • MATARAEL 2012/02/14 20:29 #

    영화가 구리면 망상력을 동원해서라도 재미있는 걸로 해석해 버리겠다는 자가조달 마인드입니다.
  • NOT_DiGITAL 2012/02/02 22:52 # 답글

    웃기는데 한편으로는 리얼합니다. orz

    NOT DiGITAL
  • MATARAEL 2012/02/14 20:29 #

    현실은 항상 픽션보다 스릴 쇼크 서스펜스
  • 아크메인 2012/02/03 01:04 # 답글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싸 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깨알같은 재미!!!!

    잘보고갑니다.
  • MATARAEL 2012/02/14 20:30 #

    모든 드라마틱한 시츄에이션은 크리티컬과 펌블에서 나오는 것이 RPG 의 법칙이랍니다.
  • WeissBlut 2012/02/03 02:23 # 답글

    적절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각본이 RPG 리플레이였을것 같은 기분이 드네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MATARAEL 2012/02/14 20:32 #

    각본이 안써져서 고민하던 각본가는 심심풀이 삼아 참여한 일일 플레이에서 영감을 얻고..... ?!
  • 대공 2012/02/13 21:17 # 답글

    이것도 잘 봤습니다
  • MATARAEL 2012/02/14 20:32 #

    잘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 모튼 2012/03/04 09:14 # 답글

    그럴싸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입력 영역


Contact

사교의 관 web 폐쇄

PSN ID: Salamis_k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