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들의 일본관이 낳은 좀 기묘한 기사

"증발한" 일본인들의 섬뜩한 이야기
(eggry 님의 이글루에서 트랙백)


이 기사는 메인 주제도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것보다는 외적인 면에서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사에서 그려지는 일본은 적어도 제가 직접/간접적으로 체험해온 일본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었거든요. 그보다는 뭐랄까, 과거 서구 사이버펑크 작품에서 그려지던 '23세기의 기업국가 네오-닛폰의 수도인 최첨단 사이버 도시 울트라-도쿄' 같은 기괴한 자포니스크 빵빠레가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러한 위화감은 기사의 곳곳에 깔린 디테일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대체 이치로와 토모코는 왜 아이 이름을 Tim 이라고 지었을까요. 막판에 사랑과 자유를 꿈꾸는 덕후 문화의 본질에 대한 연설을 한 Matt 이란 친구는 일본 덕후계에 놀러온 서양인일까요? 그렇다면 왜 굳이 외국인을 상대로 일본인들의 생각에 대해서 물어본 것일까요? 뭐 이름이야 잘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 일단 넘어가고, 마샬 아츠 마스터가 뜬금없이 만두집을 열려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직업을 바꿀 수도 있는 법이니 역시 넘어갑시다. 스시집이 아닌게 어딘가요.


'산야'에 대해서는 더 가관입니다. 기사에 쓰인 문구만 보고 있으면 웬지 쿠론즈게이트 구석에 숨어있는 신비의 슬럼가인것 같지만 현대의 동경에 그런게 있을리 없지요. 실제로는 과거 지역명이 山谷 (さんや)라고 불리던, 일용직 노동자가 많이 모여들어서 싸구려 숙박시설이 많고 전체적으로 빈곤한 그런 지역일 뿐입니다. 인터넷도 없고! 개인 화장실도 없고! 라고 호돌갑을 떠는데 이 분들 한국 고시원 좀 후진 곳 보여주면 놀라서 기절하시겠네요.... 빈곤한 지역 = 슬럼 이라고 하기도 뭐한게 오히려 숙소가 싸고 치안과 교통도 좋아서 외국인 배낭여행족들에게 인기라고 할 정도입니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핫토리라는 사람은 증발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TV쇼에 컨설턴트로 참가했다고 하는데, 언급되는 주인공 이름을 보니 90년대에 영화에 이어 TV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夜逃げ屋本舗 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된 스토리는 채무자들의 야반도주를 돕는 업자인 주인공이 채권자 및 야쿠자 등과 대립하는 내용으로, 분명 기사 내용이 완전히 틀린건 아닙니다만 뭔가 좀 이상하네요...


이런 식으로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이상하게 어긋나있는' 경향은 디테일 뿐만 아니라 기사 전체의 방향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들은 분명 비극적이고 일본 특유의 사정도 있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 - 경제불황 - 고용악화에 따른 중산층 몰락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고 보고 있는데요, 그걸 굳이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practicing this most masochistic form of penance' '존재를 포기' 같은 극적인 어휘를 써가며 장중하고 거창하게 일본식 미학을 억지로 갖다붙이려는 것이 결국 위화감의 주된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정도의 미학적인 해석 능력이라면 '엑봇 최모씨가 루리웹 플게에 악플을 달았습니다' 라는 현상을 보여줘도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지배하는 거대기업이 개발해낸 총탄마저 튕겨내는 초고성능 게이밍 머신의 숭배자인 에드워드-최는 그가 영혼을 바친 게임기가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수치심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국계 재벌 삼성이 개발한 자폭기능내장형 원격디바이스 갤럭시-노트-쎄븐을 기동합니다. 그는 오늘도 세계 유수의 정보화 국가인 한국의 IT 기업들을 차례로 파괴해온 악명높은 R-웹에 잠입한 뒤 세계 엔터테인먼트 사업 독점을 노리는 일본계 자이바츠의 사업에 대한 사보타쥬를 감행하는데, 그의 결의에 찬 모습에서 현대 첨단기업들의 암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정도로 멋들어지게 꾸미지 않을까 의심이 드네요.

한편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반면에 현대 일본에서 이러한 몰락한 중산층이 도망친 결과 도달하는 보다 일반적인 결과인 '노숙자' 에 대해서 별 이야기가 없는 점도 기사에 대해서 미심쩍은 기분이 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기사 원래대로 돌아가서 취재를 한 사람을 보니....오 젠장 프랑스인이잖아. 유럽 최강의 일빠국가 프랑스!!!


이젠 뭔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글 시작에서는 유난히 사이타마의 사꾸라를 강조하더니 마지막에서는 뜬금없이 일본의 자살의 전통은 사.무.라.이. 까지 올라간다! 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데서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요. 내 장담하건데 프랑스놈들을 불러놓고 일본 문화에 대해 글을 쓰게 하면 소재가 '월요일의 타와와' 이건 '프레임암즈걸'이건 'PPAP'이건 간에 무조건 사무라이나 벚꽃에 미학에 대해서 언급하는 문구를 끼워넣고 말겁니다.

그런 사정을 보니 이 위화감의 정체에 대해서도 좀 더 명확하게 감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킬빌에서 주인공이 '오키나와에서 스시집을 하는 핫토리 한조를 찾아가서 사무라이 소드를 얻은 뒤 도쿄 한복판의 요정에서 가면쓰고 모임을 갖는 야쿠자들을 썰어버리는' 광경을 볼 때의, 세계대전Z 소설판에서 줄곧 침착하고 담담하던 어조가 일본 덕후와 맹인 사무라이 파트에서 갑자기 열띠게 바뀌던 때 느낀 그것과 비슷합니다.

음, 예시로 든 것들이 하필 좀 그렇긴 하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부정적인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으니 간단히 정리해봅니다.


- 이 기사가 짚어보고 있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 파고들어볼만한 의미가 있습니다.
- 다만 저자의 일본문화를 바라보는 과도하게 호돌갑스러운 시선이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고 봅니다.
- 기사에 나오는 '사라지는 일본인들'은 우주 저편의 하라키리 외계인이 아니라, 여기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비슷한 고민과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그런 호돌갑에 휘둘리지 않고 좀 더 현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덧글

  • eggry 2016/12/23 07:32 # 답글

    네 맞습니다 ㅎㅎ 과하게 수사적이고 오리엔탈리즘이라고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얘기죠. 전 사실 시스템적 면모가 있다는 게 흥미로워서 옮겼지만 질적으론 좀 글쎄요? 이긴 합니다.

    뭐 다른 부분들은 관점 때문에 변질됐을 수도 있는데 이름은 가명 붙이는 과정에서 일본가명을 제공 안 해서 대충 붙인 걸 수도 있겠죠.
  • MATARAEL 2016/12/23 14:00 #

    좀 떨어져서 보면 전체적인 맥락은 괜찮게 잡고 있는데, 디테일로 들어가니 괴이해져서;; 정작 일본인들이 이 기사 보면 뭥미? 할 것 같더군요. 현지에서 5년 동안 굴렀으면 슬슬 일뽕 빠지고 차분하게 볼 수 있어야 할텐데...
  • 제트 리 2016/12/23 10:00 # 답글

    뭐라 할 말은 없군요 ㅠㅠ
  • MATARAEL 2016/12/23 14:00 #

    문제제기 자체는 나쁘진 않다는게 함정...
  • Scarlett 2016/12/23 11:29 # 답글

    저도 원문 보고 좀 위화감을 많이 느꼈었는데..ㅎㅎ 역시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네요.
  • MATARAEL 2016/12/23 14:04 #

    주변에 일본 사정 아는 사람들한테도 기사 보여주니 디테일한 부분에 정신이 빼앗겨서 혼란스러워하더군요;;
  • 111 2016/12/23 18:40 # 삭제 답글

    역시 양키들이란
  • MATARAEL 2016/12/24 14:10 #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서구에 대해 오버하면서 쓴 기사를 그쪽 사람들이 보면 마찬가지 황당함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죠
  • K I T V S 2016/12/23 19:13 # 답글

    무... 무서운 일뽕ㄷㄷㄷ
  • MATARAEL 2016/12/24 14:11 #

    5년 동안 현장을 돌아다니면서도 안 빠지는 진성 일뽕....
  • 포스21 2016/12/23 19:49 # 답글

    확실히 그런 위화감이 좀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노숙자 문제를 생각할때 결국 사람사는 곳이 다 비슷비슷한 거 같아요
  • MATARAEL 2016/12/24 14:11 #

    뭐 그렇다고 현지의 문화적 특성을 너무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적당한 선에서 양립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a 2016/12/24 00:05 # 삭제 답글

    평소의 네오사이타마인데 뭐가 이상한지?
  • MATARAEL 2016/12/24 14:12 #

    어허, 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며 하이쿠를 읊는 닌-쟈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
  • 0151052 2016/12/24 02:40 # 답글

    제가 얼마나 순진한 사람인지 다시 깨닫게 해주시는 명쾌한 분석입니다. ㅠ.ㅠ
  • MATARAEL 2016/12/24 14:13 #

    딴건 몰라도 프랑스인이 일본에 대한 썰을 풀기 시작하면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라이나 Zen 같은 단어가 나오면 위험신호입니다!
  • 궁금한점 2016/12/24 16:42 # 삭제 답글

    궁금한점이 있기는 합니다.
    실직후 경제적 어려움과 상실감에 우울감에 빠지고 홈리스 되는거야..전세계적으로 흔한 경우이긴 하지만..
    홈리스가 꼭 남자인가 하는 점은..

    IMF이후 홈리스 대다수가 실직한 남성들.. 여성들은 집에서 남은 애를 키움..
    일본도 케이스가 전부 실직한 남성들이 홈리스 되는 이야기 뿐이라..
    이게 동양권 특유의 문화인지.. 아니면 다 비슷한건지..

    그냥 궁금해졌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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