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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들어온 성계의 전기 4권을 읽다보니 이전 내용이 궁금해져서 3권을 읽고, 그러다보니 다시 집에 있던 이런저런 문고판 소설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어쨌든 매일같이 한권씩 들고 다녔는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주석과 한자의 압박에 질려서 접어둔 이후로 한동안 정지 상태였거든요; 라이트 노벨 계열이나 하루키 등등은 가볍게 읽어내려갔건만, 역시 그런 소설들을 즐겁게 읽기에는 제 문학적 감성은 너무나 얕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좌절....
하여튼 그런고로, 몇년전 싸그리 사서 파죽지세로 읽고는 쳐박아두었던 십이국기를 다시 꺼내서 차례대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에 다 읽고 나서는 '단 한번 읽고 말 책을 이렇게 다 사모았단 말인가....'하고 생각하니 웬지 아까운 기분이 들었는데 결국 그렇지도 않았군요. 이야기의 흡인력은 여전히 강렬해서, 가끔 한가할때나 들춰보려고 꺼냈다가 다른 일 다 팽개치고 붙잡고 있습니다. 달의 그림자 편의 재미라면 역시 상권에서 온갖 고생을 하는 주인공을 보며 바닥까지 떨어지는 끝장난 기분을 맛보고, 하권에서 다시금 빛의 세계로 급상승하며 인간이 되어가는 안도감을 느끼는 과정이겠지요. (특히 옛날에 처음 읽을 때에는 실제로 심신이 피곤한 상태에서 밤새면서 읽다보니 200% 감정이입이 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사실 어설프게 어레인지를 가한 TV판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긴 상권의 홀로 방황하는 부분을 그대로 재현했다가는 시청자들이 일찌감치 다들 떨어져나갔겠지만서도. 바람의 바다 편은 뭐랄까, 옛날에 있었던 '소공자'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불우한 환경에 있던 착하고 귀여운 아이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듬뿍 사랑받게 되고, 중간에 몇가지 고난도 겪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행복으로의 길을 찾게 된다~ 라는 솜사탕 같은 내용이니까요. 그래서 십이국기 전체 중에서도 읽기에는 제일 부담없는 파트입니다. 동의 해신 편은 그다지 감흥은 없습니다. 연왕이나 로쿠타 같은 캐릭터들은 역시 조역으로서 활약할 때가 가장 빛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주요 등장인물이라곤 웬 남자 세명(+수명) 끼리만 나와서 투닥거린다는 점에서도 마이너스. (중요함) 한권짜리 에피소드 중에서는 이쪽보다는 똘똘한 아가씨의 모험담이 나오는 도남의 날개 편이 더 재미있었군요. 단편모음집인 화서의 유몽 편은 논외. 제일 흥미진진한 파트를 딱 하나 고른다면 역시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을 꼽고 싶습니다. 세 아가씨들이 나와서 각자의 시점에서 고생하고 삽질하고 고민하고 깨우치면서 한 곳으로 모이는 과정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지요. 역시 이런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고, 같은 이유로 경국(慶國)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대체적으로 재미있는 편입니다.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은 다 좋은데 '마성의 아이'와 연결되는 부분이 하도 침울해서 좀... 아니 근데 어쩌다가 총평으로 분위기가 흘러갔지? 이전부터 십이국기 신작은 대체 언제쯤 나오는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잘 살펴보니 웬지 분위기가 별로 안 좋습니다. 연재 초기에만 해도 한 1-2년 간격으로 신작이 나오곤 했는데, 점점 간격이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도남의 날개 (96년) 이후로는 무려 5년이나 지나서야 황혼의 물가 편(2001년)이 나왔던 거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확인했군요. (단편집인 화서의 유몽은 여기서도 논외) 게다가 별로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도남의 날개부터는 책 마지막에 언제나 붙어있던 작가 후기마저 없습니다. 혹시나 작가가 슬슬 이 시리즈를 쓰는 것에 질리거나 지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지도? 뭐 아직 황혼의 물가 편이 나온지 4년밖에 안 지났고, 2002년에는 시귀(屍鬼)를, 작년에는 이런 미스테리물을 내놓는 등 작품활동 자체는 여전히 활발한 듯합니다. 한 몇년 더 느긋히 기다려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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